지역시민모임 토론회 열고 기억 공간 조성 논의
(광주=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일제 강점기 광주 청년들의 소양 공간인 '흥학관'이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지휘 본부이자 전국 확산의 거점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흥학관기억시민모임과 광주 동구청은 5일 광주시의회에서 시민단체, 지자체, 역사단체 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 사적 흥학관 기억공간 조성 토론회'를 열었다.
노성태 흥학관시민모임 대표는 주제 발표를 통해 "1929년 11월3일 광주 고보생과 일본 학생들이 동문다리 등지에서 대치하던 급박한 상황에서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장 장석천과 나승규, 국채진 등이 흥학관에서 긴급회의를 열어 투쟁 방향의 대전환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노 대표는 이어 "흥학관의 긴급 지침은 독서회 중앙부 책임비서였던 장재성에게 전달됐고, 독서회 회원들을 주축으로 오후부터 거리시위로 전환됐다"며 "오전의 학생들 간 패싸움이 일제를 타깃으로 한 저항의 거리 시위로 바뀌면서 거대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신주백 전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흥학관에 터를 잡은 광주청년동맹이나 광주소년동맹 및 흥학관에서 활동했던 전남청년연맹 소속 간부들의 활동 때문이다"며 "흥학관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국지휘 본부였다"고 강조했다.
토론회에서는 흥학관의 기념공간 조성 방안도 논의됐다.
지자체나 민간단체가 직영 또는 위수탁하거나 민간이 역사 공간을 무상 임대하고, 지자체가 운영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흥학관은 1921년 광주 광산동 100번지 일대에 광주 유지인 최명구(1860~1924)가 회갑 잔치를 기념, 1만원을 기부해 청년들의 수양 공간으로 건립됐다.
해방 이후 광주시청의 부속건물 및 시의회 건물로 활용되다 1960년 후반 시청이 계림동으로 이전되면서, 건물 자체가 헐렸다.
minu21@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4/09/05 18:46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