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가 다른 의사 아이디로 접속, 진료기록 허위 작성해"
"병원 측은 '법대로 하라'는 답변만…의료사고 입증, 피해자에겐 계란으로 바위치기"
전문가들 "의료사고 발생 시 사고 원인에 대한 설명 의무화해야"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수사가 시작되고 나서야 기가 막힌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아들의 의무기록은 누락됐으며, 심폐소생술(CPR) 중인 환자가 있어 응급치료가 불가하다는 병원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4년 전 '응급실 뺑뺑이'로 인해 아들을 잃고 재판 중인 김소희 씨는 "철옹성 같은 의료 권력과 거대 병원 앞에서 약자인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했다.
암 투병 중이었던 김씨의 남편은 아들 사망의 진상 규명을 위해 1인 시위를 하다가 병세가 악화해 2022년 숨졌다. 이후 김소희 씨는 홀로 긴 법정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10일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서울 종로구 포레스트구구에서 '제24회 환자샤우팅카페'를 열었다. 연합회는 2012년부터 환자와 가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이들을 위로하며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는 이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사연 발표자로 나선 김소희 씨는 "의사가 아들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설명해 주고 사과하기를 원했지만, 병원에서는 '법대로 하라'는 답변만 했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고, 알 길도 없었다"며 형사고소에 나선 이유를 밝혔다.
서울서부지검의 지난해 수사에 따르면 김씨의 아들인 김동희(사망 당시 만 4세) 군은 2019년 10월 4일 양산부산대병원에서 편도선 제거 수술을 받았고, 회복 과정에서 출혈 증세를 보였다.
이에 집도의 A씨는 동희 군을 다시 마취하고 환부를 광범위하게 소작(燒灼·지짐술)했다. 이 때문에 추가 합병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졌지만, A씨는 이러한 사실을 의무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게다가 심한 통증과 탈수 등으로 집중 관리가 필요한데도 담당 의사와 부모에게 정확한 상태와 유의사항, 응급상황 대처법을 설명하지 않았고, 동희 군은 그대로 퇴원했다.
2차 병원에 입원했다가 대량으로 피를 토한 동희 군은 119 구급대에 의해 양산부산대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다른 CPR 환자가 있어 수용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아 응급실 뺑뺑이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실 병원서 CPR을 받던 해당 환자는 동희 군 수용 요청 전 2시간에 이미 응급실에서 퇴실해 별도 중환자실로 이동한 상태였다. 검찰은 "현재까지 발생하지 아니한 다른 CPR 발생 위험을 핑계로 피해자(동희 군)에 대한 응급의료를 기피했다"고 판단했다.
후속 보완수사에서는 김군을 담당한 양산부산대병원 전공의가 다른 당직 의사 아이디로 접속해 진료기록을 허위 작성한 사실도 밝혀졌다.
김소희 씨는 "집도의에게 '출혈이 살짝 있었는데 지혈이 돼 수술은 잘 끝났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된다'는 말을 들었고, 의료지식이 없는 보호자 입장에선 이를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며 "처음부터 진심 어린 사과와 설명을 해 줬더라면 여기(고소)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진실을 알기 위해 민사소송에 나섰지만, 김씨는 "의료지식이 없는 피해자가 의료사고를 입증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고 말했다.
김씨는 "형사소송에서 검찰이 증거를 확보한 후에야 의료범죄 입증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또 "대한의사협회 등 3곳에 진료 감정을 맡겼지만, 의무기록지 자체가 왜곡돼 있다 보니 편파적인 감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김씨의 사연에 샤우팅카페에 참석한 의료사고 관련 전문가들은 의료사고 발생 시 환자·의사가 모두 힘든 소송까지 가지 않도록 충분한 설명 의무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응급의료법 개정안의 후속 입법을 빨리 마련해 응급실 수용 불가능 통보 기준을 정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한국의료변호사협회 고문을 맡는 이인재 변호사(법무법인 우성)는 "현 의료법은 수술 전후 유의사항이나 합병증, 부작용에 대해서는 설명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만, 의료사고 발생 시 사고 원인에 대한 해명은 법제화돼 있지 않다"며 "해명에 대한 법적 의무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일 울산대 의대 교수는 "우리 연구팀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적극적으로 소통을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비교하자 소통이 활발했을 때 (피해자의) 소송 의향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병원 대부분은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에 대한 대처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지적하며 의사들을 대상으로 설명 교육이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이러한 경우 의사의 공감·사과의 표시가 소송 증거로 활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의사들이 환자에게 의료 사고를 설명하고 사과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나라에서는 피해자들이 형사 고소를 잘 하지 않는다"며 "최근 정부가 의료사고 형사 처벌 특례를 논의하고 있는데, 적어도 이걸 논하기 전에 외국처럼 피해자들의 울분을 해소하는 입법을 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합회는 이날 정부가 의료개혁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의료사고 형사 특례'에 대해 반대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정부안에 "응급·분만 등 고위험 필수의료 행위는 중상해·사망사고까지 형 면제를 검토한다"고 돼 있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연합회는 "의료사고 피해자·유족은 의료적 전문성과 정보 비대칭성을 특징으로 하는 의료행위 관련 분쟁 시 절대적 약자"라며 "환자 안전을 위협하고 위헌적인 내용이 포함된 의료사고처리특례법 대신 형사고소를 하지 않고 의료 분쟁을 해결하도록 '의료사고 설명의무법' 등부터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김동희 군 사망으로 인해 '응급의료기관의 응급환자 수용 의무와 불가능 시 통보 기준'을 규정하는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지난 2021년 국회를 통과했으나, 시행령 미비로 핵심인 '불가능 통보 기준'이 불명확하다며 응급실 뺑뺑이를 막기 위해 시급히 후속 입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fat@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4/09/10 14:55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