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소설 원작…성소수자 딸 둔 중년 요양보호사 이야기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너희들이 뭘 할 수 있는데? 혼인신고 할 수 있니? 자식은? 가족이 될 수 있는 거냐고."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하게 막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딸'(임세미 분)과 언쟁을 벌이던 '나'(오민애)의 말문이 순식간에 막힌다.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침묵이 지나간다.
딸은 7년간 사귄 여자친구가 있지만 나는 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싫은 건 싫다고, 부당한 건 부당한 거라고 말하라고 딸을 가르쳤으면서도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해임된 동료 강사를 위해 투쟁하는 딸을 극구 말리기도 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다른 사람처럼 구냐는 딸에게 나는 답한다.
"너는 내 딸이니까."
이미랑 감독의 첫 장편영화 '딸에 대하여'는 딸과 그의 동성 연인(하윤경)과 한집에서 살게 된 나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딸이 평범한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믿던 내가 조금씩 딸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2017년 출간돼 제36회 신동엽문학상을 받은 김혜진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주요 캐릭터와 스토리는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일인칭 문장이나 문어체 느낌이 강한 대사는 상당 부분 걷어냈다. 대신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소리, 미장센 등 영상 표현으로 영화적 재미를 주면서도 원작의 분위기를 살렸다.
영화는 주인공인 나의 집 안팎에서의 일상을 번갈아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치매 노인을 돌보는 요양보호사로서의 정체성과 한 집안의 가장이자 엄마로서의 정체성이 교차한다.
일터에서의 나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치매 노인들을 정성껏 보살핀다. 특히 피붙이 하나 없는 제희(허진) 할머니를 친어머니 대하듯 봉양한다.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할머니에게 기저귀를 채우지도, 손발을 묶지도 않는 건 그의 모습이 꼭 딸의 미래 같아서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여자 애인과 부부처럼 지내는 딸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갑갑해진다. 정상 가족이라는 사회 안전망을 거부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딸이 그는 안타깝기만 하다.
부모의 관점에서 성소수자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변규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2021)이 연상될 수 있지만, 극영화인 '딸의 대하여'가 오히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자식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무한 응원하는 '너에게 가는 길' 속 부모들보다 "내 딸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며 부정하는 나의 반응이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선입견을 더 잘 보여주는 듯 해서다.
그러나 '딸의 대하여'는 영원한 평행선일 줄 알았던 모녀가 차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희망을 놓지 않는다.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사랑할 수는 있는 사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은 모녀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그동안 눈 감았던 사회적 약자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동성애자인 딸은 학교 규탄 집회를 열었다가 해임당한 시간제 강사이고 나 역시 병원 측이 언제라도 자를 수 있는 노동 약자다. 한때 모두가 우러러봤던 제희 할머니는 이젠 이리저리 병원이 옮겨져도 항의해줄 가족 한 명 없는 무연고 노인이다.
영화는 노년, 중년, 청년 세대의 소수자인 세 사람을 스크린에 소환해 관객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이들을 계속 외면할 것인지, 아니면 함께 살 것인지.
극적인 스토리와 상반된 담백한 연출은 이 같은 물음을 진지하게 곱씹도록 돕는다. 영화 속 세계에 빠져들어 각 인물의 상황에 놓이게 된 관객은 비로소 우리 곁의 약자들을 느끼게 된다. 독립영화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와 그 가치를 몸소 보여주는 셈이다.
이 감독은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향해 지속적으로 다가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며 "관계와 연결에 대한 어떤 순간들을 담고 싶었다"고 전했다.
작품은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CGV상을 받았고 엄마인 나를 연기한 오민애에게 올해의 배우상을 안겼다.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관객상과 CGK촬영상(김지룡)을,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에선 감독상을 가져갔다.
9월 4일 개봉. 106분. 12세 이상 관람가.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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