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여성들이여 가슴을 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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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환 기자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책이든 미술관에서든 처음 들어보는 화가를 만나는 일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새로운 여로(旅路)에 들어서는 기분이 든다.

이 작가도 그중 한 명이다. 처음 그의 그림을 접하고 쏙 반했다. 여기저기 검색하며 그의 작품들을 요모조모 살펴보며 푹 빠졌다. 미국 인상주의 화가 찰스 커트니 커란(1861~1942)이다.

그림에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없다. 빨래하거나, 아이들과 산책하며, 정원을 돌보는 등의 일상을 그린 그림이 다수였으나, 광대한 자연 앞에 선 한 여인을 그린 그림을 보며 전율이 일었다. '햇빛이 드는 골짜기'(1920)다.

'햇빛이 드는 골짜기'

'햇빛이 드는 골짜기'

개인 소장

시대 분위기에 맞게 하얀 드레스를 입고 산에 오른 모습이다. 불편해 보이는 옷은 아니다. 산 아래 굽이진 자연을 내려다보는 당당한 자세는 그림을 보는 이들 마음을 확 트이게 한다.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가 뒷모습 남성으로 그린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20세기 여성 버전' 같다. 프리드리히가 그린 뒷모습에 비해 옆얼굴 표정을 드러내 더 당차 보인다.

다른 작품, '언덕 위에서'(1909)에선 세 명의 여성을 그렸다. 눈과 손을 보니 무언가 중요한 결심을 한 표정과 자세다.

'언덕 위에서'

'언덕 위에서'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소장

세 명의 여성이 나란히 산을 오른 것일까? '정오의 햇살'(1924)은 밝은 햇살을 받으며 미래에 대한 포부를 밝히는 듯한 세 여성이다. 자연에 발붙인 자유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정오의 햇살'

'정오의 햇살'

리치먼드 미술관 소장

노동하는 여성도 지치거나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다. '양배추밭'(1914)에선 복장만 작업용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밭일 현장에서도 꿋꿋하게 서 있다. 가슴에 안거나 손에 꼭 쥔 양배추는 작물과 노동에 대한 애착을 일렁이게 한다.

'양배추밭'

'양배추밭'

개인 소장

남성 화가지만, '모든 그림에서'라고 할 만큼 여성을 그렸다는 점이 놀랍고, 굴복이나 굴종, 피로한 여성이 아니라 의연한 여성을 고집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커란의 생애를 살펴보면 여성을 집중적으로 그려야 했던 특별한 동기가 발견되지는 않는다. 미국 켄터키 출신으로 뉴욕과 파리에서 그림을 배운 뒤 고향에 정착한 평범한 삶이었다.

그의 작품 경향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다. 전원이나 자연, 가정에 속한 여성들을 이상화된 아름다움으로만 포장했으며, 당시 실제 여성들 고된 현실이나 차별받는 고통을 외면했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도시보다 농촌에서 작품 활동을 한 '전원의 화가'임을 감안한다면, 그런 비판도 의당 극복된다. 오히려 사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땅과 자연에는 차별과 차이가 없다.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여성이 홀로 설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연설했다. 20세기 명저로 인정받는 '자기만의 방'(1929)이 그 문학적 결과다.

울프가 강의와 책을 통해 여성의 미래를 논파했다면, 커란은 회화로써 가슴 활짝 편 여성의 현재를 구현했다. '자기만의 방'이 아닌 '나만의 자연'이다.

산 위에 선 여성을 그린 작품을 하나 더 보자. '햇살 든 아침'(1917)은 위에서 본 한 여성이 다시 산에 오른 모습이다. 자연은 그녀들에게 휴식과 평온, 의지를 품게 하는 매개체로 운신한다.

'햇살 든 아침'

'햇살 든 아침'

내슈빌 파르테논 소장

커란은 당대 여자들에게, 지금 여성들에게, 아니 모든 이들에게 이런 목소리를 뿜고 있다. "가슴을 펴라. 멀리 보라. 그러면 아름답다"

dohh@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4/09/07 08: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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