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데 뚝 부러진 '철교 붕괴' 충격에 도심 범람·다리 침수 우려도 확산
강풍에 쓰러진 나무로 교통체증 극심, 평소보다 3배 더걸려…일부 마트 '사재기'
(하노이=연합뉴스) 박진형 특파원 = "홍강을 지나는 철교가 끊어진 판에 무서워서 홍강 다리를 누가 건너고 싶겠습니까."(하노이 한 교민)
30년 만의 최고 위력을 가진 슈퍼태풍 '야기'가 지난 7일 베트남 북부를 강타한 지 닷새가 지났지만, 연일 폭우가 계속되는 가운데 수도 하노이도 곳곳이 물에 잠기면서 피해가 불어나고 있다.
특히 하노이를 관통해 흐르는 베트남 북부 최대 강인 홍강 물이 20년만의 최고 수위로 치솟으면서 현지인들은 물론 하노이 내 한국 교민·주재원 사회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지난 11일(현지시간) 새벽 하노이 외곽 단독주택에 사는 기자가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더니 집 안 이곳저곳이 물바다였다.
밤사이 옥상에 쏟아진 폭우가 배수구로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옥상 출입구를 통해 넘쳐 계단을 타고 집 안으로 온통 흘러내린 것이다.
깜깜한 옥상으로 달려 올라가 우산을 때리는 굵은 빗줄기와 간혹 울리는 천둥소리 속에서 배수구를 살펴보니 나뭇잎 더미가 잔뜩 쌓여서 물을 막고 있었다.
평소라면 옥상에 나뭇잎이 쌓일 일이 없었겠지만, 최대 풍속이 시속 166㎞를 기록한 야기의 엄청난 강풍에 주변 나무들의 가지가 부러지고 이파리가 사방으로 흩날리면서 옥상도 나뭇잎으로 뒤덮인 것이다.
다급하게 나뭇잎 더미를 손으로 마구 끄집어내 치우고 나니 물이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집 바닥에 고인 물을 빗자루로 화장실로 쓸어내고 나서야 엉망진창이 된 집 안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노이의 다른 여러 지역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같은 날 홍강을 끼고 있는 호안끼엠·타이호·바딘·롱비엔 등 하노이 주요 지역은 곳곳이 침수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골목길마다 맛집이 즐비한 유서 깊은 구시가지 호안끼엠은 강변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수십㎝씩 물에 잠겼다.
현지 언론에는 비닐 비옷 차림의 주민들이 가슴까지 차오른 흙탕물을 헤치며 플라스틱 대형 대야에 살림을 싣고 대피하는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다.
어떤 주민들은 오토바이 같은 세간살이를 작은 보트에 싣고 주변 사람들도 보트에 태우면서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현지 주민 반 티 후옌(26·여)는 이날 기자와 만나 "내가 평생 이곳에 살았는데 이렇게 거리가 물에 모두 잠긴 것은 처음이라 놀라고 무서웠다"면서 "집 바닥과 집 앞 턱이 높아 물이 집안까지 들이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타이호 지역의 랜드마크인 복합쇼핑몰 '롯데몰 웨스트레이크 하노이' 앞을 지나는 보찌꽁 대로도 왕복 10차선의 넓은 도로가 온통 흙탕물이 물결치는 하천으로 둔갑했다. 이 밖에 시내 여러 주요 도로도 물에 잠겼다.
또 강풍으로 쓰러진 나무들까지 곳곳에서 도로를 막으면서 하노이 교통 사정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번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는 하노이 시내에서만 2만5천여 그루에 이르는 것으로 당국은 추산했다.
시내 어디를 가나 뿌리째 뽑혀 도로에 누워 있는 지름 수십㎝의 두꺼운 나무들이 즐비했다.
당국이 경찰·군인·자원봉사자 등 인력을 당장 시급한 주민 대피 중심으로 투입하다 보니 이처럼 쓰러진 나무의 상당 부분이 아직 그대로 쌓여 있다.
침수된 도로가 적지 않은 데다가, 물에 잠기지 않은 도로를 찾아 우회해도 나무 둥치가 차선 대부분을 막아 간신히 한두 차선으로만 통행하는 경우도 있다.
하노이는 평소에도 대중교통이 빈약해 교통체증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현재 도로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난 10일께부터 시내 주요 길목마다 차량 수백∼수천 대가 수 킬로미터씩 장사진을 이루는 극심한 교통 대란을 겪고 있다.
기자가 현장을 둘러보러 간 곳은 택시로 평소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이날은 무려 3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정상적인 이동이 어려운 상황이다.
하노이 주민 부 티 두옌(26·여)씨는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를 비롯해 곳곳이 물에 잠겨서 길이 엄청나게 막힌다"면서 "아이가 다니는 학교 주변도 침수돼서 비가 계속 오면 휴교할 수도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홍강 수위가 위험 수준으로 높아지면서 홍강을 지나는 주요 다리들이 잇따라 교통 통제에 들어가자 교통난은 물론 주민들의 불안도 한층 커지고 있다.
홍강 수위는 11일 낮 20년 만의 최고치인 11.1m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하노이시 당국은 2단계 홍수 경보를 발령했다.
기상 당국 관계자는 "(홍강의) 홍수 수위가 2004년에 11m를 넘겼는데 20년 만에 이런 일이 재연됐다"고 현지 매체 VN익스프레스에 밝혔다.
특히 지난 9일 북부 푸토성에서 홍강 상류를 지나는 퐁쩌우 철교가 무너져 자동차·오토바이 10여대가 강물로 추락한 사건의 심리적 충격이 크다.
당국은 이 사고 다음 날인 지난 10일 하노이 주요 교량인 롱비엔 다리 통행을 전면 중단하고 다른 핵심 교량인 쯔엉즈엉 다리에서는 대형버스·트럭 등 고중량 차량의 통행을 제한했다.
현지 주민과 한국 교민들 사이에서는 퐁쩌우 철교 붕괴 장면이 담긴 차량 블랙박스 영상이 메신저 단톡방에서 공유되면서 불안감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만약 홍강 수위가 더 높아질 경우 강물이 대대적으로 범람해 하노이 전역을 덮치거나, 교각 대부분이 불어난 강물에 삼켜진 하노이 내 다리들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교민 오봉찬(53)씨는 기자와 통화에서 "홍강을 지나는 철교가 끊어졌는데 무서워서 누가 홍강 다리를 건너가고 싶겠느냐"면서 "오늘도 내가 간 커피숍 앞 나무가 쓰러졌는데 끔찍하다"고 말했다.
김형모(48) 대한상의 하노이사무소 소장은 "홍강 강변은 물론 도심 곳곳에도 침수된 곳이 많다"면서 "밤에 비가 또 내리면 홍강이 넘칠까 걱정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홍강을 건너서 학교에 다니는 국제학교 학생 부모들이 자녀를 조기 하교시키거나, 일부 학교들이 자체적으로 휴교하는 사례도 잇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홍강 동쪽 롱비엔 지역의 한 국제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김혜미(43·여)씨는 "11일 차량 정체가 심해지고 홍강 2단계 홍수 경보 발령 뉴스가 단톡방에 쫙 퍼지자 불안해하는 여러 엄마가 곧바로 점심께 학교로 찾아가 아이들을 미리 데려왔다"면서 "어떤 국제학교들은 12일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불안감에 일각에서는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기업 주재원 배우자 최모(44·여)씨는 "홍강 다리 교통 통제 소식이 들린 뒤 집 근처 마트에 가니 쌀, 고기, 계란, 라면 등 식품류를 주민들이 줄을 서서 사갔다"면서 "진열대가 텅텅 비어서 남은 식품류를 급하게 사 왔다"고 했다.
실제 전날 오후 기자가 찾은 하노이 교외 마트의 경우에도 즉석식품 진열대에 놓여있던 라면 등이 텅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이런 가운데 평소 오후 10시에 폐점하는 롯데몰 웨스트레이크 하노이는 11일 폐점 시간을 오후 6시로 앞당겼다.
jh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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