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은 약관에 '상속불가' 못박아…'디지털 유산법' 국회 문턱 못 넘어
(서울=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 "남편이 죽고 정말 많이 힘들었는데, 남편이 키우던 '로스트아크' 캐릭터로 게임을 즐기며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중략) 그런데 어느 날 본인인증을 하라는 알림이 뜨며 접속이 안 되더군요"
충남 서천군에 사는 56세 여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A씨가 지난 1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다.
A씨는 30년을 함께 산 배우자와 2020년 사별하며 남편이 남긴 계정으로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로스트아크'를 즐겼다.
자신의 애칭이 담긴 남편의 캐릭터로 4년간 거의 매일 게임을 즐기며 우울증과 자살 생각도 떨쳐내고,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몇 주 전, 여느 날처럼 게임에 접속한 A씨에게 청천벽력 같은 문구가 떴다. 계정 보안 조치로 접속이 제한되면서 본인인증을 하라는 것이다.
A씨는 "죽은 남편의 명의로 본인인증이 불가능해 고객센터에 사정을 설명하고 가족관계증명서와 사망확인서, 통장 사본 등 필요한 서류를 모두 제출하겠다며 보호조치를 풀어달라고 했지만, '도움을 주기 어렵다'는 대답만 돌아왔다"며 "그날부터 하루하루 지옥 속에서 살아간다"고 남겼다.
안타까운 사연이 확산하자 '로스트아크'를 서비스하는 스마일게이트도 재빠르게 사실관계 확인에 나섰다.
스마일게이트 관계자는 이와 관련한 질의에 지난 12일 "최대한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며 "이번을 계기로 고인의 직계가족에 대한 명의 이전 프로세스도 점검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 엔씨·넥슨, 계정 상속 절차 완비…명확한 규정 없는 게임사 대부분
A씨의 사례는 그만큼 게임업계가 게임 캐릭터나 아이템에 대한 상속 문제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온라인 게임이 청소년과 청년층은 물론 중장년층과 노인까지 아우르는 보편적인 여가 활동으로 자리 잡아 갈수록 비슷한 사례는 더욱 많아질 전망이다.
이런 경향은 캐릭터와 아이템의 소유권이 강조된 MMORPG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국내에서 오랜 기간 다수의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을 서비스해온 엔씨소프트[036570]는 고객센터에서 계정 이전과 관련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엔씨소프트 고객지원 사이트에 따르면 계정 명의자의 사망으로 아이디 이전이 필요한 경우, 친족임을 증빙할 가족관계증명서를 팩스로 제출하면 계정을 넘겨받을 수 있다.
만약 계정을 받을 사람보다 상속 순위가 우선하거나 같은 사람이 있을 경우, 당사자로부터 권리 포기와 관련한 서류도 받아오라고도 안내하고 있다.
넥슨도 고객센터에 관련 문의를 남길 경우 '가족 명의 변경 동의서' 양식과 함께 관련 서류, 서명 등을 제출받고, 증명이 완료되면 계정 명의를 이전해주고 있다.
넷마블[251270]도 홈페이지에 관련 내용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나, 별도로 문의하는 경우 계정 이전 절차를 안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사례를 제외하면 게임 계정 상속 절차를 안내하고 있는 국내 게임사는 찾아보기 드물다.
해외 게임사도 계정 상속과 관련해서는 정책이 천차만별이다.
장수 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비롯해 여러 장르의 게임을 서비스하는 블리자드는 고객지원 홈페이지에 사망한 친족의 '배틀넷(Battle.net)' 계정 명의를 본인 명의로 바꿀 수 있도록 절차를 안내하고 있다.
또 부모나 보호자가 미성년 자녀의 계정을 이전받거나, 그렇게 계정을 넘겨준 미성년자가 성년이 되고 나서 이를 회수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반면 전 세계 점유율 1위의 PC 게임 플랫폼 스팀(Steam)은 계정 이전이나 라이브러리에 등록한 게임을 물려받는 일이 원칙적으로 불가하다고 약관에 명시하고 있다.
계정 주인이 생전 수집한 수백 개의 게임 라이브러리가 사망할 경우 말 그대로 '공중분해'되는 셈이다.
이런 방침은 한 해외 게임 커뮤니티 이용자가 지난 5월 "내가 만약 죽으면 유언장을 통해 스팀 계정을 양도할 수 있느냐"고 묻자 고객센터가 약관을 근거로 '불가능하다'고 답한 사실을 공유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지난 국회서 폐기 '디지털 유산법'이 답 될까
계정 상속은 현재까지 어디까지나 게임사의 호의에 기대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이른바 '디지털 유산법' 입법이 추진됐다가 임기 만료로 폐기되기도 했다.
작년 4월 발의된 정보통신망법 일부개정안은 이용자가 오랫동안 자신의 계정에 접속하지 않거나 사망·실종 등의 사유가 인정될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하고, 이용약관에 따라 미리 승계인을 지정해 넘겨받을 수 있도록 했다.
포털 사이트나 메신저 계정 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법이지만, 게임에도 비슷하게 적용이 가능할 전망이다.
이철우(법률사무소 문화) 변호사는 "법령이나 이용약관에 비춰볼 때 게임사가 사망한 게이머의 상속인에게 계정 정보나 캐릭터, 아이템을 이전해 줄 의무는 엄밀히 말해 없다"며 "오히려 게임산업법이 금지하는 환전행위나 점수 보관에 해당할 여지가 있어 금지하고 있는 게 보통"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게임 관련 상속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기존 법과의 충돌 여부, 적정선 등에 대한 법적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jujuk@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4/09/14 11: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