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족집게 별명…'러스트벨트 상징' 베슬리햄, 녹슨 굴뚝 아래 분열된 유권자들
한때 세계2위 철강기업 있었으나 이젠 녹슨 구조물…노동자표심 따라 대선 '출렁'
"트럼프는 민주주의 위협"·"해리스는 경제에 위협"…지지 후보 놓고 팽팽한 대립
(베슬리햄·이스턴[미 펜실베이니아주]=연합뉴스) 강병철 특파원 = 50여일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의 최대 경합주인 펜실베이니아주의 북동부에 위치한 노샘프턴 카운티.
펜실베이니아의 최대 도시인 필라델피아에서 북쪽으로 80㎞ 거리에 위치한 이 카운티는 대선 때가 되면 미국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다.
2020년 통계 기준으로 인구가 31만여명에 불과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대선 족집게', '대선 풍향계'로 불리고 있어서다.
노샘프턴 카운티는 1920년 이후 역대 대선에서 3번을 제외하고 승자를 맞힌 높은 '대선 결과 적중률'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2008년 대선 이후로만 보면 버락 오바마(2008년), 버락 오바마(2012년), 도널드 트럼프(2016년), 조 바이든 대통령(2020년)이 이 카운티에서 승리했으며 대선에서도 이겼다.
3천여개의 미국 카운티 가운데 이런 투표 패턴을 보여주는 이른바 '벨웨더(bellwether·지표) 카운티'는 노샘프턴 카운티를 포함해 25개에 불과하다.
9일(현지시간) 필라델피아 기차역에서 309번 도로를 타고 차로 1시간 30분 정도 달려 도착한 노샘프턴 카운티의 베슬리햄(Bethlehem)에서 그 이유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산등성이 길을 빠져나와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에 진입하자마자 전체적으로 검붉게 녹(rust·러스트)이 슨 70m 높이의 용광로(고로) 굴뚝들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 하늘과 대비돼 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거대한 철골 구조물은 한때 미국 철강의 상징 가운데 하나였던 베들레헴스틸의 잔해다.
세계 2위 철강기업으로 기록되기도 했던 베들레헴스틸은 이 용광로에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금문교, 1·2차 세계대전 미군 군함 등에 사용된 강철 제품을 만들었다.
노샘프턴 카운티를 포함하는 리하이 밸리(Lehigh Valley) 지역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이 철강 회사는 수익성 악화로 1995년 제철소 문을 닫았고 2003년에는 회사 자체가 없어졌다. 이제는 문화 공연 시설 등으로 활용되고 있는 베들레헴스틸은, 북부 대선 경합주를 가리키는 다른 말인 '러스트벨트'(rust belt·미국 오대호 연안의 쇠락한 공업지대)를 보여주는 상징물로 전락했다.
베들레헴스틸과 같은 기업들이 망하고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흉물로 변하는 동안 민주당의 강력한 지지층이었던 노동자들의 마음도 변했다.
중공업과 제조업 등이 쇠퇴하고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민주당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지가 약화됐으며 일부는 아예 공화당 지지로 돌아선 것이다.
그 변심의 결과가 2016년 대선이다.
펜실베이니아는 1992년 대선 이후로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선택했으나 2016년에는 정계 이단아였던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며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노샘프턴 카운티 역시 1992년 대선 이래 민주당 후보를 밀었으나 2016년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5천400여표(2위와 3.78%포인트차)를 더 줬다. 2020년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상대로 1천200여표(0.72%포인트)차로 이 카운티에서 신승했는데 일부 노동자 표를 다시 흡수한 것이 그 이유로 분석됐다.
결국 '경합주 내 경합 카운티'로 불리는 노샘프턴 카운티의 승패는 백인 노동자 유권자가 갈랐던 것이다.
이번에도 이들 백인 노동자 표심이 노샘프턴 카운티를 포함하는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해 러스트 벨트에 위치한 북부 경합주 선거의 핵심 변수로 꼽힌다.
이들 표심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이슈는 인플레이션 문제를 비롯한 경제라는 것이 미국 언론의 대체적 분석이지만, 베슬리햄과 이스턴에서 만난 노샘프턴 카운티 유권자들의 표심은 더 복잡하게 갈라져 있었다.
베들레헴스틸 근처에서 만난 70대 남성 민주당 당원 에드먼드씨가 제기한 핵심 이슈는 오히려 1·6 의사당 폭동 사태와 맞물린 민주주의 문제였다.
자이언트 슈퍼마켓 직원 티셔츠를 입고 전동 휠체어를 탄 그는 "트럼프는 대선 패배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민주주의를) 공격했다"면서 "이 사람이 다시 뽑힐 수 없다"고 자신했다.
그는 2016년에 노샘프턴 카운티를 비롯한 펜실베이니아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자 "그때는 사람들이 트럼프를 몰랐다"면서 "당시 트럼프는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등 때문에 당선됐는데 이곳은 당시 트럼프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던 곳이다. 뉴욕이나 뉴저지 등 트럼프를 잘 아는 주(州)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인플레이션 등 경제 문제에 대한 현 정부의 책임을 물으니 우크라이나·이스라엘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두 개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데 미국이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물가가 오르는 것"이라면서 "특히 휘발유 가격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고 올랐고 그로 인한 물류비 상승 등이 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에드먼드씨는 그러면서 "바이든이나 해리스가 두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베슬리햄 다운타운에서 만난 공화당 당적의 제니퍼 스토펄(61)씨도 '트럼프 불가론자'였다.
스토펄씨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등판하고 나서 안도했다면서 "트럼프는 범죄자이고 추악하다. 그런데 바이든은 늙고 힘이 없어 보여서 대선이 어떻게 될지 걱정했다"면서 "해리스가 대선 후보가 되고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 정책과 관련해서는 "현재의 경제 시스템이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면서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야 나처럼 다달이 월급으로만 사는 사람들의 걱정을 덜 수 있다"면서 해리스 부통령의 '부자 증세' 기조를 지지했다.
스토펄씨 역시 고(高)물가를 체감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코로나19 이후 회복 과정에서 생긴 문제로 진단했다.
베슬리햄 시내에 위치한 모라비안 대학교에서 만난 '이대남'(20대 남성) 조의 생각은 에드먼드나 스토펄씨와는 달랐다.
올해 21세로 이번에 대선은 처음 투표하게 된다고 밝힌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당적이 없는 그는 "트럼프가 이미 한차례 재임했는데 또 한다고 민주주의에 근본적인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 "아직 사회생활 경험은 없지만, 학생인 내가 보기에도 물가가 비싸다"면서 "경제 문제가 이번 대선의 제일 큰 이슈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가 경제 정책 면에서 더 잘할 것으로 보지만 사회적인 이슈 측면에서는 잘 모르겠다"면서 "선거는 차악(the lesser of the two evils) 중에 선택하는 것이 될 텐데 아직 누구에게 투표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날 베슬리햄 시내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나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 팻말 등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시내에서 나와 카운티 행정기관 소재지인 이스턴으로 이동하면서 옥수수밭 등 농지 사이로 허름한 주택들이 나타나자 이른바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트럼프 전 대통령 선거 구호) 표식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두세 집에 한 집꼴로 바이든 대통령을 비판하는 문구 및 성조기와 함께 '2024 트럼프 밴스' 깃발을 단 동네도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샘(51)씨는 물가와 이민 정책을 거론하며 대뜸 바이든 대통령을 비판했다.
그는 "기름값이 여전히 3달러 중반인데 시추는 금지하고 친환경 정책을 하고 있다"면서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건 다 불법 이민자들에게 갔다"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의 핵심 유세 메시지를 되풀이했다.
그는 그러면서 "해리스가 되면 바이든보다 더할 것이다. 그녀는 경제에 위협"이라며 "트럼프가 돼야 경제가 살아나고 미국이 다시 위대해질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장에서 만난 유권자들은 경제와 민주주의 등을 놓고 다각적으로 대립했으나, 샘프턴 카운티 인근에 소재한 뮬렌버그 칼리지 정치학과의 크리스토퍼 보릭 교수는 여전히 경제 문제가 중요한 이슈라는 입장을 밝혔다.
대선 때마다 노샘프턴 카운티의 선거를 추적하고 있는 그는 연합뉴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카운티에서 최근 집값이 급등한 것을 비롯해 경제 문제와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카운티 유권자의 표심을 결정하는 제1의 이슈"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 "바이든에서 해리스로 후보가 변경된 이후에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열기가 감지되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적지 않은 미국인들이 미국이 가는 방향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트럼프가 이를 바꾸겠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트럼프가 2016년처럼 펜실베이니아에서 이길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고 전망했다.
solec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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