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국 정부 저격, 외교결례로 볼 수도…"北 의식해 불참" 추측도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주한 영국대사가 '남성 편중' 패널 구성을 공개 저격하면서 오는 3일 열리는 통일부 국제 포럼 행사에 참석을 거부한 것을 두고 반응과 해석이 분분하다.
주한 영국대사관이 "성평등 가치 지지"를 선언하며 콜린 크룩스 영국대사가 2024 국제한반도포럼에 불참할 것이라고 알린 것은 지난달 28일. 이 소식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국내외로 빠르게 확산했고, 뉴스를 퍼나르며 "속이 후련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여성 이용자들이 이어졌다. 고위직 인선이 50대 이상 남성에 쏠림이 지나치다는 지적에 귀를 막은 정부의 관행에 '일침'을 가한 크룩스 영국대사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토론 패널 선정은 성별에 무관하게 오로지 전문성이 기준이어야 한다는 반론도 잇따랐다. "영국이 PC(정치적 올바름)를 좇다 반이민 정서를 부채질해 국론이 분열됐다"는 등 강대국의 '정치적 올바름' 과시에 대한 반발도 빈번하게 눈에 띄었다.
결과적으로 지난달 30일 통일부는 남성 20명, 여성 1명이던 토론 패널에 여성 6명을 추가했다.
이번 논란에서 관심을 일으킨 또다른 부분은 크룩스 대사의 의사 표현 방식이 외교사절로서 극히 이례적이라는 점이다.
한 나라의 외교사절, 특히 한국과 영국처럼 '가치를 공유'한 '유사 입장국'의 대사가 주재국 정부의 행사 패널 선정을 공개 지적하는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주재국의 제도나 관행이 자신의 소신과 차이가 있더라도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강조하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발신하는 방식을 택한다. 예를 들어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는 퀴어 축제에 영상 메시지를 보내 지지와 연대를 표현한다.
주최측에 경종을 울리고자 보이콧 사실이 알려지길 원하더라도 막후에서 정보를 흘리되 대사관은 확인해주지 않는 것이 외교가의 일반적인 행동방식이다.
더욱이 크룩스 대사는 한국에 부임하기 전 북한 주재 대사로도 근무했는데, 당시 그가 북한당국을 향해 여성 차별 등 인권 문제를 공개 비판한 사례는 알려진 게 없다.
외교적 결례로도 비칠 수 있는 이례적 행동은 북한과 관계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온다.
2020년 북한의 국경 봉쇄 때 평양에서 대사관을 철수시킨 영국은 올해 들어 스웨덴, 독일 등과 함께 북한으로 복귀를 적극적으로 타진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2월 유럽 국가 대표단을 초대하는 등 서방 공관 재가동 준비 움직임을 보였으나 현재까지 구체적인 진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북한에 상주 공관을 운영했던 서방 국가들 사이에 어느 나라가 가장 먼저 복귀할지 일종의 경쟁이 벌어진 분위기"라며 "최근 북한이 우선 복귀 국가로 검토하는 나라는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안다"고 말했다.
영국이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자유민주주의 통일'과 '북한 실상 이해'를 주제로 하는 통일부 행사를 공개적으로 거부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공교롭게도 지난 30일 통일부가 주최한 납북자·억류자 문제의 국제연대를 위한 공청회에 호주, 스페인, 아일랜드 등이 부대사급 이상 외교관을 보냈지만 영국과 스웨덴에서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한편 크룩스 대사 측의 입장 표명이 외교적 결례일 수 있다는 취재진의 지적에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달 29일 "성차별 문제에 대해 정부는 항상 차별이 있어선 안 된다는 입장을 원칙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면서, 영국대사관과 이와 관련한 의사소통을 하거나 입장을 낼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tre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4/09/01 07:18 송고